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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전 기간을 통틀어 ‘광풍’이라고 불릴 정도의 민간인 대학살이 집중적으로 벌어진 것은 1948년 10월 17일 제 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문이 발표되면서부터다. 이 포고령은 곧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해촌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태워 없애고, 굶겨 없애고, 죽여 없애는” ‘삼진작전(三盡作戰)’이 전개된다. 소위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이 기간 중산간마을의 가옥은 95%가 전소되었는데, 약 3만 채가 불에 태워졌다. 생활 터전을 상실한 주민 2만 여 명은 결국 살기 위해 한라산으로 대대적인 도피를 시작한다. 이듬해인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과 선무를 병행한 작전으로 토벌 작전이 바뀌고, 신임 유재홍 사령관이 “한라산에 피신한 주민들은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방침이 발표될 때까지 근 4개월에 걸친 기간 동안 섬의 곳곳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만행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상이었다. 그 4개월 간은 4.3 특별법에서 규정한 4.3의 공식전개기간인 1947년 3월 1일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금족령이 개방되면서 7년 7개월의 기간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제주섬 주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긴 기간이기도 했다.
곤흘동 마을의 불에 태워지고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시기도 이 기간이었다. 곤흘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것은 1949년 1월 5일과 6일 양 일간이었다. 1949년 1월 5일(음 1948. 12. 6) 오후 3∼4시 쯤 군인 1개 소대 약 40명의 군인들이 곤흘동을 포위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곤흘동 집들을 수색하고 돌아다녔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껌벅이는 마을 사람들을 전부 모이게 하고는 나이가 젊은 사람들 10여 명 골라내어 곤흘동 바닷가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 마을 주민들은 화북국민학교에 가두었다. 이어 곤흘동도 불태웠다. 1월 5일에 불탄 곤흘동의 집들은 안곤흘 22채, 샛곤흘 17채였다. 학살은 1월 6일에도 이어졌다. 화북국민학교에 가뒀던 주민들 중에 젊은이들 12명을 모아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 밑 속칭 ‘모살불’에서 학살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학살에 그치지 않고 곤흘동의 남아 있는 집들도 1월 6일에 불태웠다. 이날 밧곤흘의 28세대의 가옥도 모두 불태워져 곤흘동의 자취는 사라져버렸다. 67호의 적지 않던 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곤흘동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변 마을로 옮겨졌다.
4.3 당시 전소된 가옥만 3만여 채에 이르는데, 4.3이 종결된 이후에도 복구되지 못한 속칭 ‘잃어버린 마을’만도 100개소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중산간마을들이다. 해촌마을이 이처럼 완전히 전소된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겠다. 왜냐하면 불태워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소개되어 피란 생활을 했던 곳이 일주도로를 빙 돌아 소재했던 해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전소된 북촌리의 경우도 사건이 종료된 후 다시 주민들이 집터를 고르고 서까레를 다시 세우면서 하나 둘 가옥들을 복원해 다시 마을이 이루어졌지만, 이곳 주민들은 밧곤흘 동측의 화북리에 옮겨 살아 곤흘동은 다시는 복구되지 못했다. 이때 폐허로 변한 곤흘동은 이후에도 집과 집을 구분 지었던 울담(울타리 돌담)만 남은 풍경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그나마 울담만 남은 곳은 예전의 안곤흘 마을로 샛곤흘의 경우는 밭터로 변해 마을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안곤흘 마을터는 당시 불타버린 집터의 울타리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올래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아궁이로 사용했던 흔적도 남아있으며, 연자방아간의 방앗돌과 집터가 비교적 뚜렷이 남아있다.
안곤흘을 둘러 돌던 마을의 좁은 길은 하천 확장으로 일부가 무너져 있으며, 가옥들이 들어섰던 곳은 하나로 합쳐져 밭이 되어버린 경우도 있다. 안곤흘은 현재 농사를 짓는 밭들은 없다. 2005년 제주시에서 별도봉 산책로를 마을 안까지 연결하는 공사를 하면서 마을 원형이 일부 파괴됐고 2013년 안곤흘의 바닷가인 드렁곶에 해안 침식을 막는다면서 도리어 해안산책로를 내어 다시 원형이 일부 훼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전의 자연스런 폐허는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