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터'는 일제 시기 일본인들이 신사를 모셨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지역주민들은 제일 먼저 이 곳을 때려부쉈다. 이 곳은 원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4․3 당시 토벌대는 이 곳을 지역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신사터에서 형님(이종남)이 희생되었다는 이치근 씨는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 간의 알력에서 민족청년단이 밀리게 되고, 결국 민족청년단 총무부장을 맡았던 형님은 모함에 의해서 당시 돌아가시게 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신사터에는 1957년에 중문천주교회가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Ⅱ』
'신사터'는 일제 시기 일본인들이 신사를 모셨던 곳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해방이 되자 지역주민들은 제일 먼저 이 곳을 때려부쉈다. 이 곳은 원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으슥한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4․3 당시 토벌대는 이 곳을 지역 주민들을 일상적으로 학살하는 장소로 이용했다.
신사터에서 형님(이종남)이 희생되었다는 이치근 씨는 대동청년단과 민족청년단 간의 알력에서 민족청년단이 밀리게 되고, 결국 민족청년단 총무부장을 맡았던 형님은 모함에 의해서 당시 돌아가시게 된 것이라고 토로했다. 신사터에는 1957년에 중문천주교회가 들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