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내던 조선시대의 정자
·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
· 올레18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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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북정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590년(선조 23) 당시의 조천관(朝天館)을 다시 짓고 쌍벽정(雙壁亭)이라고 하였다가 1599년에 다시 건물을 짓고 연북정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건물은 네모모양의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정자가 망루의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후 좌우퇴의 평면에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방법이 모두 제주특별자치도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한편, 연북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조천리의 옛 이름은 조천관이었다. 조천관은 부산.인천과 더불어 우리 나라 3관 중의 하나로서 제주목의 출입 항구였다. 이 선창가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조천석이다. 조천관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바위에다 닻줄을 걸어 배들을 매곤 하였다. 어느 해엔가 중구에서 유명한 지관이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저 바위를 보이지 않게 감추시오. 만일 감추지 않으면 조천에는 불량한 사람이 많이 나서 이민(里民)이 못 살게 도리 것이요. 감추면 인물이 끊이지 않겠소.”
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조천면 관내 9개 리(里)의 백성을 부역시켜 성을 쌓는 동시에 이 조천석을 흙으로 덮어 메워 둥글게 높이 쌓아 올렸다. 여기에 정자를 지어 ‘쌍벽정’이라 했다가 연군의 의미를 붙여 연북정이라 고쳤다. 그 후로 조천에는 삼대문학이 나고, 현감. 군수가 다수 배출되었고, 명월만호만도 18이나 나왔다.
197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590년(선조 23) 당시의 조천관(朝天館)을 다시 짓고 쌍벽정(雙壁亭)이라고 하였다가 1599년에 다시 건물을 짓고 연북정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것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건물은 네모모양의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의 모양과 크기가 옹성과 비슷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정자가 망루의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전후 좌우퇴의 평면에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방법이 모두 제주특별자치도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