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옛 터이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선생,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선생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선생등 다섯 분이다. 단은 원래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는데 현종 6년(1665) 이중신이 목사로 있을때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지었다. 그리고 숙종8년(1682) 신경윤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선생, 송인수선생, 김상헌선생, 정온선생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 21년(1695)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선생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전국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도 헐렸으나 고종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철종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선생의「증주벽립」마애명과 충암 김정선생과 우암 송시열선생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제주 옛 성터가 있다.
제주도 기념물 제 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방어사로 부임하여 이 지방 교학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옛 터이다. 오현은 중종 15년(1520)에 유배된 충암 김정선생, 중종29년 (1534)에 목사로 부임했던 규암 송인수선생, 선조 34년(1601)에 안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선생, 광해군 6년(1614)에 유배된 동계 정온선생과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선생등 다섯 분이다. 단은 원래 선조 11년(1578) 임진이 목사로 있을 때 판관 조인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 김정을 모시는 충암묘를 지은 것이 시초였는데 현종 6년(1665) 이중신이 목사로 있을때 판관 최진남이 충암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지었다. 그리고 숙종8년(1682) 신경윤이 절제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선생, 송인수선생, 김상헌선생, 정온선생의 4현을 봉향하다가 숙종 21년(1695) 이익태 절제사 때 송시열선생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케 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전국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귤림서원도 헐렸으나 고종29년(1892) 제주사람 김의정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비를 세우고 제단을 축조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단내에는 5현의 유적으로 철종7년(1856) 판관 홍경섭이 새긴 송시열선생의「증주벽립」마애명과 충암 김정선생과 우암 송시열선생의 적려유허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제주 옛 성터가 있다.
40년 만에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탐라국 제주도를 방문 했습니다.
친한 친구의 숨겨둔 명소를 공개 해주었는데 사실 반 강제로 끌고 갔어요.
이 친구는 마음이 급했는지 발걸음을 제촉 했는데 영주영사 오현단이 본인 어린시절
놀이터 였다고 자랑 했는데
가서 보고 한눈에 반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성 애자 입니다.
저의 첫 제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1순위는 이곳 오현단 입니다.
4월에 따듯한 봄날 이었지만 그 어느곳 보다 선선 하고 아늑 했습니다.
제주에 숨겨진 명소가 그렇게 많지만 다음에도 이곳에서 2시간 정도 머무르며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예정 입니다.
이곳 근처에 집을 얻어 살고 싶기도 하네요.
정말 매력적인 장소 여서 난생 처음 이곳에 사진도 등록 하네요.
좀더 자세한 내용은 제 블로그에 남겨 놓지만 광고성 글은 아닙니다. (이음새 ㅅ)
1박 3일 일정으로 급하게 지난주에 다녀 왔는데 꿈꾼 것 같네요.
탐라국 제주도가 왜 환상의 섬 이라고 하는지 저두 이제 공감이 됩니다.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