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의 상징인 조천읍 북촌리에 4.3 희생자들을 위로하여 후세들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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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4.3기념관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마을이다.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 '해동'이라는 마을이 서쪽에, 또 산간 선흘리 방향으로 '억수동'이란 마을이 흩어져 있기도 했었다. 북촌리는 일제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사건과 1948년 6월 우도지서장 살해와 납치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의반타의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집단총살 당한 것이다. <구좌면-동복리-희생터-난시빌레 참조>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희생을 가져온 북촌리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 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많은 흔적들이 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1949년 1월 17일 함덕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4.3,실내,미술/박물관,부모,비.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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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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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1599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북촌3길 3
064-783-4303
33.545986
126.6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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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넷째 월요일 휴무 /유적지 해설 가능/ 1월1일, 설연휴기간, 추석연휴기간/입장마감 17:00
북촌리는 조천면의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변 마을이다. 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지만 서우봉과 접해 '해동'이라는 마을이 서쪽에, 또 산간 선흘리 방향으로 '억수동'이란 마을이 흩어져 있기도 했었다.
북촌리는 일제 시대에는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 후에는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자치 조직이 활성화 됐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947년 8월 경찰관에 대한 폭행 사건과 1948년 6월 우도 지서장 살해와 납치 사건이 북촌리 청년들에 의해 벌어지면서부터 늘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고, 4․3의 와중에는 많은 청년들이 토벌대의 횡포를 피해 피신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의반 타의반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1948년 12월 16일에 첫 번째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민보단을 조직해 마을을 지키고 토벌대에 협조하던 24명의 주민들이 느닷없이 군인들에 끌려가 동복리 지경 '난시빌레'에서 집단 총살 당한 것이다. <구좌면-동복리-희생터-난시빌레 참조> 이 엄청난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도 못한 1949년 1월 17일,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북촌리에서 자행됐다. 4․3 당시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리 학살 사건이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한 동서 쪽 들과 밭에서 자행된 것이다. 이 날 북촌리의 마을에 있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다. 명절처럼 제사를 한날 한시에 지내는 북촌리에는 너븐숭이 애기무덤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많은 흔적들이 있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1949년 1월 17일 함덕 주둔 2연대 3대대 군인들에 의해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집결한 북촌리민들은 50~100여명 단위로 끌려나갔다. 먼저 학교 동쪽 당팟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쪽 너분숭이 일대로 주민들을 끌고 온 군인들은 탯질, 개수왓 등지에서 주민들을 집단 총살했다. 그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 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녀자 등 일부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어른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다가 사태가 안정된 후 안장되기도 했으나 당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은 임시 매장한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그곳이 지금의 너븐숭이 소공원이다.
이곳은 4․3 이전 부터도 어린 아기가 병에 걸려 죽으면 묻던 곳이라 한다. 지금까지 소나무와 가시 덤불이 무성하여 무덤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 사업으로 부지가 정리되면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지금 현재 이곳에는 20여기의 애기무덤이 모여있고 그 옆 밭과 길 건너에도 몇 기의 애기무덤이 있다. 그중 적어도 3기 이상은 북촌대학살 당시 희생된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이 곳의 모든 무덤들이 4․3 희생자의 무덤은 아니지만 당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잔디나 변변한 장식도 없이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참혹하고 무모한 학살을 알려주기에는 더 없이 중요한 공간이다. 따라서 어설프게 무덤을 치장하거나 양지로 이장하는 성역화보다는 지금 현재의 상태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반추하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